'삼성전자·애플·TSMC도 줄선다?' 일본 중소기업, 왜 강할까 - 매일경제

※ '한중일 톺아보기'는 한중일을 중심으로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이슈를 살펴보는 주간연재코너입니다."중소기업의 존속이 일본경제를 지탱한다"-일본경제산업성
흔히 일본은 한국에 비해 중소기업이 강하다고들 한다. 국내에서 일본 중소기업에 대한 주목도는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판결을 이유로 단행한 반도체 관련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수출 규제 보복 이후 더 높아졌다. 일본 경제는 만성 저성장에 시달리고 있고 각종 기관에서 산출하는 글로벌 대기업 순위에서 일본 기업의 이름은 찾기 힘들어졌다. 일본은 선진국 중 유일하게 과학기술 논문 수와 질에서도 뒷걸음 치며 1990년대 세계 2위 였던 점유율은 최근 4위까지 떨어졌다. IMD 국가경쟁력 종합순위에서도 하락세가 완연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본이 세계 3위 경제규모를 유지 중인 건 강한 중소기업들이 버팀목이 돼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일본 중소기업이 만드는 제품 중에는 세계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는 것들이 즐비하다. 일부는 애플, 삼성전자, TSMC 등 초일류 기업들을 사로잡아 단골 고객으로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소리없이 강한 이들의 모습은 파나소닉, 도시바 등 과거 잘 나갔지만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일부 대기업들과도 대비된다.
한국과 일본은 양국 모두 전체 기업의 99% 이상, 전체 종사자의 약 7~80%가 중소기업과 중소기업 종사자다. 둘다 절대적이지만 종사자 비율면에서는 한국이 다소 더 많다. 하지만 아직 한국 중소기업들의 경쟁력은 일본 기업들에 못미치고 있다. 지난 2019년 중기중앙회가 소부장 기업 1002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국내 기업들은 자사 기술력을 일본 경쟁사 대비 약 89% 수준으로 자체 평가 한바 있다.
일본의 중소기업, 특히 소부장 기업들 중에는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곳들이 많다. 이들은 규모가 크지 않고 주로 B2B사업을 하기 때문에 인지도가 높진 않다. 하지만 이들이 생산하는 제품의 가치는 위에 언급했듯 세계 초일류 기업들이 줄서서 거래 할 정도다.
예를 들면, 레이저테크 라는 회사는 반도체 마스크 결함 조사 장치를 만드는데 이 장비에 대한 세계 시장 점유율이 100%다. 반도체용 포토 레지스트 최대 생산기업 도쿄오카공업의 시장 점유율은 25%, 포토 레지스트에 들어가는 핵심 원료를 만드는 동양합성공업은 점유율 50%를 자랑한다. 특히 도쿄오카공업은 삼성전자의 중요한 거래 파트너 이기도 하다.
반도체 분야 이외에도 경기장, 공항 등에 쓰이는 돔 기술에 특화한 타이요 공업, 1980년대 부터 초소형 CCTV 카메라 강자로 군림중인 와테크 등 숨은 시장을 공략한 중소 기업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높은 점유율 덕에 세계 시장에서 과점 또는 독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들의 지배적 점유율은 결국 대기업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차별화 되는 기술력에 기인한다. 일본에는 왜 이처럼 기술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들이 많은 걸까. 이에 대해 다양한 분석과 논의가 있지만 여기서는 전쟁, 사회문화,기업 환경 등 크게 3가지 요인에만 집중해 보기로 한다.
태평양 전쟁 이전 일본 제조업 수준은 미국과 유럽에 비해 한없이 조악했다. 일제가 미국과 독일 등으로 부터 기술 지도를 적극 유치했지만, 당시 일본기업들이 만드는 제품은 지금처럼 세계에서 통하는 제품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수업체로 동원된 민간기업들은 전차, 군함, 전투기 등 무기를 생산하면서 제조업 기반기술도 함께 키울 수 있었다.
또한 전후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하는 제도적 뿌리가 형성된 것도 이 무렵 이었다. 전시 실시된 임금 통제령은 연공서열임금·종신고용이라는 일본 특유의 고용관행으로, 군수업체 지원을 위한 명령융자제도는 중화학 등 유망업종과 기업에 자금을 집중시키는 관치금융으로 각각 변모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본의 소부장 기술발전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군수산업에 뿌리를 둔 대기업 지주회사 체제는 계열사 거래관행으로 이어졌고, 이는 중소기업간 경쟁과 혁신을 더디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오히려 일본 소부장 산업 발전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본격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패전 후 전쟁에 종속돼 있던 일본의 자원들은 한꺼번에 물밀 듯이 방출됐다. 군수업체 폐업후 일자리가 없던 많은 기술자들은 대안으로 창업을 택했고 수많은 기업들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1950년대 중반 일본은 창업률 20%, 폐업률은 15%까지 치솟았다. 소니, 무라타 제작소 같은 유명한 대기업들 뿐 아니라, 현재 기술력으로 평가 받는 많은 소부장 중소기업들도 이때 생겨났다.
이후 1990년 무렵까지 일본의 창업 기업 숫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창업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 맞물려 일본 정부는 남극 탐험기지 건설, 우주개발, 스바루 천체 망원경 제작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여기에 참가한 일본의 소부장 기업들은 극한의 프로젝트에 도전하며 기술적으로 크게 도약할 수 있었다.
'모노즈쿠리', '곤조(根性·근성)'는 일본인들이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설명할때 단골로 언급하는 메뉴다. '최고의 제품을 위해 혼신을 다한다'는 뜻인 모노즈쿠리에는 일본 제조업 경쟁력이 그들 특유의 문화에서 발원한다는 기술 사관이 담겨있다. 모노즈쿠리 정신에 입각해 깊게 한 우물을 파는 성향이 일본 소부장 기술력을 뒷받침하는 요인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들은 보통 창업 이후 본업에 충실하면서 제품을 개선하는 노력을 끈질기게 쏟아온 곳들이다. 특히 소재와 부품의 경우 산업 특성상 연구개발 등에 장시간이 소요되고, 숙련도가 품질을 좌우하는 아날로그식 제조가 많은 만큼 한 분야에 천착한 숙련공이 필수적이기도 하다.
사실 모노즈쿠리 라는 용어는 옛날부터 존재한 일본 고유의 말이지만, 그들 특유의 장인정신을 의식화 해 긍정적 구호로 쓰기 시작한건 1990년대 후반 무렵 부터 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장기 경제 침체와 제조업 위기를 극복하자는 사회적 의식이 크게 고조됐고, 실제로 1999년에 일본 정부는 '모노즈쿠리 기반 기술진흥 기본법'을 공표 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장인정신에 대한 강조는 자연히 근성을 중시하는 태도와도 연결됐다. 실제로 많은 일본의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을 근성에서 찾곤 한다. 일본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중소기업이 등장하고 모노즈쿠리와 근성이 소재로 쓰이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사회 저변에 깔린 중소기업 성공신화를 동경하는 분위기를 투영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도 한국처럼 직장으로서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인기가 훨씬 많다. 연봉 차이도 있지만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대기업이 주는 안정감과 견실함에 대한 선호도는 매우 높다. 하지만 비교하자면 한국 만큼 연봉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한국 중소기업의 평균 임금은 대기업 대비 60% 수준인데 반해, 일본은 꾸준히 80%수준을 유지해왔다. 또한 일본 중소기업들은 대기업 이상 고연봉을 보장하는 곳들도 많다. 동양경제 등 일본 언론은 최근 연봉이 대기업 이상으로 높고 재정도 탄탄한 중소기업들을 조사해 잇따라 소개하기도 했다.
임금 등 처우 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대기업과의 관계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는 일본 중소기업들은 끊임없이 단가 인하 요구를 받는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대기업과 중소 협력사들은 공동 이익을 위한 선을 지키는 경향이 있다.
고도 성장기 일본 중소기업들은 대기업과의 밀접한 하청관계를 통해 기술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엔고 등으로 경영환경이 어려워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회사들이 핵심 기술력을 바탕으로 탈계열화와 자립화의 길을 걸었다. 모기업 으로부터 완전 독립하는 곳들도 있었지만 사실 많은 기업들이 수주를 받아 제품을 만들어 100% 자립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술력 덕에 가격 교섭력을 높이며 이전에 비해 대기업과의 거래관계에 있어 비대칭성이 줄어들었다. 제품 개발은 물론 기획에 이르기 까지 중소-대기업이 협업하는 공동연구 개발 체제 비율도 늘어났다. 이 때문에 일본의 산업구조는 수직적이고 폐쇄적이지만 중기-대기업 관계는 한국에 비해 수평적이라고 평가된다. 이 역시 일본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된 요인 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소부장 수출 규제는 10여년전 중국의 일본을 겨냥한 희토류 규제와 일견 닮았다. 2010년 중국은 센카쿠(조어도)분쟁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희토류 수출 규제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에 대응해 일본 정부와 기업은 공급선을 다변화 하고 희토류 저감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관련분야에 지속 투자를 해온 덕에 일본은 저감기술 개발에 성공했고 결국 희토류 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의 중국산 희토류 의존도는 크게 떨어진 반면, 중국 관련 업계는 큰 손해를 봤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과거 경험에서 조금도 느낀 바가 없는지 중국이 했던 그대로 한국에 수출 보복을 단행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닛케이, 아사히 등 일본 언론들은 수출규제가 한국의 탈일본을 부추키고 일본기업의 피해만 불러왔다며 실효성 없음을 성토했다. 아사히 신문은 한국 관계자를 인용해 "한국과 일본은 정치문제로 상호이익을 저해하고 있으며 양국간 대립은 승자없는 게임으로 중국만 이롭게 할 뿐" 이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한국 정부는 소부장 탈일본 선언 2주년을 맞아 성과를 자랑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발표에 따르면 불과 2년새 22개 소부장 으뜸기업의 시총이 두 배 이상 높아졌고, 100대 핵심 품목의 대일 의존도도 25% 밑으로 내려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성과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고 반도체 3대 품목 공급망이 안정적으로 구축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자화자찬 할 상황은 아닌듯하다. 일본이 타겟으로 삼은 반도체 수출 규제 3개 품목 중 포토레지스트와 불화폴리이미드 2개 품목의 일본 의존도는 전혀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와 올 상반기 전년대비 대일 무역적자도 현저히 늘었다. 위기는 한편으론 언제나 기회일 수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국 기업들은 어떻게든 다변화와 자립화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생전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 있어 "조용히 실력을 키우면 될 것을 '타도하겠다' 목소리를 높여 상대가 경계하고 담 쌓게 하는 건 어리석은 짓" 이라고 했다. 소부장에 있어 일본과의 기술력 차이는 아직 분명하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을 넘지 못할 벽으로 인식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벌써부터 일본에 이긴 것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는 더욱 없어 보인다. 진정한 극일을 향한 지름길은 정부로서 성과자랑에 골몰하기 보다 상황을 냉정히 인식하고 묵묵히 실력을 키우는 중소기업들을 물밑에서 물심양면 지원하는 데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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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7 21:01:00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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